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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를 다녀와서

작성자 :
전미나
등록일 :
2010-06-11 11:25
조회수 :
1,595
 

아이티를 다녀와서

                                                                                          <전미나>

아이티에 갈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 주위의 많은 분들이 불안한 마음으로 걱정스런마음을 나타내셨지만, 나는 그분들과 다른 걱정에 쌓여있었다. 내 안전이 아닌, 혹여 내가 하게 될지도 모를 실수가 걱정되었다. 아직은 어린 나이에 어려운 봉사를 자원한 것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공연히 짐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도 내가 모금활동을 하게 된 요인 중 하나이다. 같이 떠나는 동료 분들에게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라는 인상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렵게 얻은 기회인 만큼 무언가 뜻 깊고, 그 무엇보다 보람 찬 봉사활동을 하고 싶었다.

모금 활동을 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어린 학생이 이런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특하게 여기고 기부활동에 많이 동참해 주실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모금을 나섰던 동생이 다니는 중학교와 그 옆 초등학교에서 마저 거절을 당하고 보니 용기와 자신감은 한없이 초라하게 위축되고 말았다. 마음과는 달리 위축된 자신감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내 용기와 적극성에 어려움에 처한 그 어느 누구의 생명이 달려있을지도 모른다는 엄마의 말씀을 듣고 나는 다시 일어섰다. 주위 지인들 몇 분께서 벌써 조금씩 송금을 한 상태였고, 모금함을 만드느라 투자한 나의 시간들이 아까워서라도 나는 해야만 했다. 하지만 막상 지하철에 들어서니 나는 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엄마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용기를 내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지하철 속의 모든 눈길 하나 하나가 나에게 집중되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짤막하게 모금 취지의 연설을 끝마치고, 빳빳한 자세로 통로를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은 지나치는 나를 쳐다보았고, 몇몇 사람들은 손길을 내밀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특히 동생은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모금운동으로 돌리며 나에게 큰 힘과 감동이 되어주었다. 모금액이 좀 더 많이 걷히는 날에는 자신감이 충만하였고, 비교적으로 적은 날에는 주눅이 들었다.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250만원이 넘는 성금이 모아졌고, 그렇게 나는 아이티에 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드디어 아이티에 가는 날이 되었다. 마지막까지 행여 빠트린 것이 없는 지 세 번, 네 번씩 확인해 보고는 출발하였다. 그 날이 할아버지 생신이라 가족들과 같이 지내지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훨씬 더 값진 경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금방 털어낼 수 있었다. 공항 버스를 타고 가는 데, 벌써 사고 하나 쳐버렸다. 인천공항이 아닌 김포공항에 도착해버린 것이다. 약속 시간은 다가왔고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침착하게 인천공항 가는 버스를 찾아서 탔다. 약속시간에 조금 늦긴 했지만, 다행히 문제는 없었다. 처음으로 아이티 가는 팀을 보았다. 팀원 중 가장 젊어 보이는 분도 최소한 나보다 나이가 10살 이상은 많아 보이는 어른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거리감도 어느 정도 있었다. 약간 늦은 것으로 인해 벌써부터 신뢰도를 잃었을 까봐 나는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바짝 긴장하였다.

13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뉴욕 공항에 도착하였다. 뉴욕 교당에서 안전하고 성공적인 봉사활동을 위하여 심고를 올리고 하룻밤을 머물렀다. 새벽 3시에 눈곱만 간신히 뗀 채 우리는 뉴욕 공항을 향해 갔다.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다 마치고 시간이 남은 관계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나에게 내려진 댄스 미션! 어른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나는 한 두번 거절하다가 춤을 추었다. 춤을 추고 나서 팀장언니가 모자를 돌렸고 그렇게 해서 $34 이상이 걷혔다. 그 돈은 모두 성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서먹서먹한 감도 약간 없어진 것 같았다.

도미니카에서 하룻밤 머물고, 그 다음 날 새벽에 아이티로 출발하였다. 이번에는 비행기가 아닌 봉고차로 이동하였다. 기나긴 시간을 달리느라 모두들 체력을 소모하였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많이 친해질 수 있었다. 친해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소중한 인연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친해질 수록 더욱 더 강한 팀웍을 발휘해 보다 성공적인 봉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갔고, 협동심을 발휘할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이티 국경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하는 바람에 아이티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우리는 도미니카에서 아이티로 들어가는 국경에서 입국에 따른 복잡한 절차로 인해 차 속에서 5시간 이상을 기다리다가 겨우 입국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구호물품을 담고 있던 컨테이너는 검색 등으로 시간이 많이 걸려 우리와 함께 아이티 로 갈 수 없었다. 국경이 닫힐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컨테이너만 남겨놓은 채 우리일행은 예정된 구호활동지로 향했다. 아직은 치안이 불안하기도 하였지만 우리 일행은 아이티와 도미니크 NGO단체의 도움으로 다행히 숙소인 아이티 주재 도미니크 영사관 마당에 텐트를 치고 지내게 되어 있었다.

그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봉사활동이 시작되었다. 전날 밤 12시부터 영사관에서 거주하고 있던 닭 두 마리가 목청이 찢어지도록 우는 바람에 모두들 한 숨도 못 잔 피곤한 상태였지만 피곤한 기색도 내지 않고 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봉사장소로 이동하면서 본 거리에는 운 좋게도 피해가 거의 없는 그런 건물들도 가끔은 있었지만, 반대로 허허벌판이 될 정도로 무너진 건물들도 많았다. 거리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거의 모든 아이티인들은 인사를 건넸고,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면 때론 반갑게, 때론 수줍게 인사에 응해주었다.

봉사활동 장소에 도착해서 내가 맡은 일은 환자들의 증상을 한글로 적는 것이었다. 크레올러에서 영어로, 영어에서 한국어로, 때로는 크레올러에서 스페인어로, 스페인어에서 영어로, 영어에서 한국어로 힘들게 통역을 하였다. 통역이 힘들다 보니까 당연히 실수도 있었다. 나 같은 경우는 빈혈을 ‘백혈구 수치가 낮음’이라고 적어내기도 했다. 점심도 간단히 빵으로 요기만 채운 뒤, 기나 긴 줄 선 사람들을 위해 부랴부랴 다시 일을 시작했다. 환자들은 대개 두통, 복통, 기생충, 불면증, 식욕부진이 많았다. 눈 앞이 캄캄해지고, 눈에 가려움증 및 고통을 호소 하는 환자들이 대다수였고, 거의 모든 여성 환자는 질 염증을 앓고 있었다. 가족 전체를 데리고 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4시에 일을 끝내고 우리는 정리를 하였다. 이날 진찰을 받은 환자들은 총 175명. 컨테이너는 아직까지도 입국허가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일정은 미루어졌다. 영사관에 돌아와서 한 명씩 씻기 시작했는데, 몇 명을 남겨놓은 채 물 공급이 끊겼다. 물 탱크 안의 물을 다 사용해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샤워는커녕 화장실 변기 물조차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탱크 바닥에 있는 물을 모조리 걷어서 머리를 간신히 감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티에서의 하루가 이렇게 시작되고 끝났다.

그 다음 날은 전날보다 잠을 더 설쳤다. 닭은 닭대로 울었고, 거기에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쏟아져 내렸다. 텐트에서 자고 있던 우리는 그대로 비에 젖었다.

바지는 행주마냥 물을 먹었고, 텐트 안에 있던 가방도 흠뻑 젖었다. 다행히도 전자제품들은 상태가 멀쩡했다. 그렇게 체력이 많이 약화된 상태에서도 일행의 그 누구 하나 티를 내지 않았다. 아침부터 줄을 서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우리는 전날보다 더 일찍 길을 나섰다. 역시나 클리닉 앞은 줄을 이었고, 우리는 서둘러 준비를 마쳤다. 일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어제보다도 더 바쁘게 일을 하였다.

사람들은 많은데 통역이 수월하게 되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다행히 크레올러가 프랑스어에서 파생된 언어라 매우 비슷하였다. 때문에, 나의 짧은 불어 실력을 이용해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해소 시킬 수 있었다. 나중에 가서는 자주 쓰이는 단어들을 익혀 어느 정도 직역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덕분에 훨씬 빠른 속도로 환자들을 볼 수 있었다. 한 환자는 증상이 생리통뿐이었다.

나는 그 환자를 보고 약간 짜증도 나고 화도 났다. 더 심각한 다른 사람들이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겨우 이런 사소한 것으로 치료를 받으려고 하나 하면서 증상을 적어 내려갔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내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지진 때문에 안 그래도 힘든데, 몸까지 아프니 도저히 심리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참기 어려워서 온 것 이었을텐데…… 한국에서 오신 의사 분들이 무료로 치료를 해준다는 소문을 듣고 평상시에는 못 받는 진료를 받으러 온 것이었을 텐데…… 그 사람은 몸을 치료 받기 보다 마음을 치료 받으러 온 것 아니었을까? 따뜻한 마음씨가 넘치는 클리닉에 와서 희망을 한 줄기라도 받으려고 왔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상대방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 화내고 짜증냈던 내가 부끄러워서 자책 하기도 하고 반성하였다.

다들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동안에 기쁜 소식이 하나 전달되었다. 컨테이너가 드디어 허가를 받고 입국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희망을 안고 더욱 열심히 자신의 일을 수행해 나갔다. 10분 동안 재빨리 식사를 마치고서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밖에서 조그마한 소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소리 지르고, 문 사이로 이리저리 치이는 사람들 모습이 보였다. 나는 살짝 겁에 질렸다. 알고 보니 워낙 사람들이 많다 보니까 새치기를 한 사람들도 있고, 슬슬 짜증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전날처럼 4시에 일정을 끝냈고 영사관으로 돌아갔다. 이 날 본 환자들은 총 300명에 다다랐다. 모두들 물이 떨어질 것 같아 조심스럽게 머리만 대충 감았다. 모두들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나를 비롯한 몇몇 언니들은 깨어 있었다. 언니들은 아이티에서 진찰한 환자들 기록을 정리하느라 깨어 있었고, 나는 아이티의 마지막 밤을 좀 더 보내고 싶은 마음과 뒤늦게 도착한 구호물품들을 구분하여 싸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침내 구호물품을 분류하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고 나는 그때서야 잠이 들었다.

구호물품 받기 전에 포옹하는 모습 마지막 날은 의료봉사를 하지 않았다. 약품이 다 떨어지기도 하였고, 또 구호물품을 나누어주는 것과 학교 자매결연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밤 사이에 구호물품들은 나누어 줄 준비를 마쳤다. 우리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각 가정마다 티켓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고 반드시 여성이 나와서 받아가게 하였다. 난 그 이유를 의아히 생각했다. 구호 물품들이 꽤나 무거울 텐데 왜 남자들이 못 받게 하나 했는데, 역시나 많은 이유가 있었다. 남자들이 받으러 나오면 공격적이게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남자들이 받으면 그것을 팔아서 도박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난 '아 이렇게 먹고 살기 힘든데도 이런 문제들이 있구나'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구호물품을 나누어줄 준비가 다 마쳐졌을 때 나와서 배부를 하였다. 나누어주기 전에 포옹을 한 번씩 했는데, 사람마다 포옹을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마지못해 안기는 사람도 있었다. 물건 받기에 바빠서 눈을 강렬하게 뜬 채로 티켓을 던지고는 물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도 과반수였다.

나는 차 앞에서 팔을 넓게 펴고 ‘포옹하기 전에 안 비켜줄 거야’ 하는 마음으로 버티고 서 있었지만 여전히 몇몇 분들은 날 제치던지 피해서 구호물품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은 그것을 집에다가 가져다 놓고 나서도 또 받을 수 있을까 하는 희망에 다시 한 번 찾아왔다.

구호물품을 배분하는 것은 아이티와 도미니카 측에다가 맡겨놓고 한국 팀은 아이티 측 대표, 도미니카 측 대표와 함께 자매 결연을 하러 갔다. 자매결연을 하는 아이들은 2~4살 정도 되는 아이들이었다. 너무 귀여운 아이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 아이들에게는 지진의 슬픔이 기억되지 않기를 바랐다. 자매결연 식을 마치고서 돌아가는 차 속에서 한 아이가 oui, yes를 외치길래 ‘네’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것이 한국말인지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따라 했다.

자매결연을 마지막으로 아이티에서의 일정은 모두 끝이 났다.

우리가 자매결연을 하고 있는 동안, 구호물품을 나누어주던 트럭이 공격을 당했다고 했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고, 배분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통령 궁 앞에서 한 번 내렸다. 거기에 내려서 사진을 찍고 있을 때, 한 청년이 나에게 다가와 사진을 못 찍게 하였다. 나는 기분이 언짢아져서 그 청년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갔지만, 우리 팀의 한 언니는 그 청년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청년은 엄마를 잃고 집도 그 무엇도 다 잃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그저 시간만 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 나는 상처의 아픔을 들어내지 않는 아이티인들이라는 말에 공감이 갔다.

우리는 그 동안 친해졌던 아이티 측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아이티를 떠났다.

가면서도 길거리에 있는, 또는 옆에 차에 타고 있는 아이티 시민들의 인사를 받느라 손이 쉴 틈이 없었다. 그들의 표정을 보니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도미니카에 도착해서 우리는 감동했다. 물이 내려가는 화장실을 본 지가 정말 오래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화장실 물 내려가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아이티에서는 그것이 그렇게 고마운 것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 하나하나가 아이티를 연상시킨다. 학교에서 급식을 남기는 아이들을 보면

'아! 아이티에서는 먹을 게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라고, 물을 낭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는 ‘아! 아이티에서는 먹을 물 조차 없어 고생인데’ 하게 되었다. 도미니카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누구나 인사를 해주는 그런 친근한 나라, 힘들어도 힘든 티 하나 내지 않는 강한 나라, 아이티에 행운이 있길 바란다.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의 성금으로 구입한 학생들을 위한 책걸상을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이번 봉사활동은 내 평생 잊지 못할 최고의 경험이었고, 더욱 강한 봉사심을 유발하게 한 계기 힘든 일을 겪고도 생계를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가 되었다. 아이티에서 만든 소중한 인연들, 그리고 경험들 나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추억이다.

힘들어하는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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